한국인 최초 『미 연방 3選 하원의원』의 위업을 달성한 김창준(金昌準, Jay ChangJoon Kim) 이사장한국 정치 선진화를 이끌 차세대 리더의 산실 『김창준 한미연구원 & 정경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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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란 타이틀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머릿돌이다. 『최초』로부터 역사는 시작되고, 그 역사가 흘러 미래로 진화한다. 최초와 미래 사이는 역사란 이름으로 응축되고, 그 속에는 뜨거운 열정과 찬란한 영예 및 눈물이 어우러지게 된다. 이 얘기는 바로 한국인 최초로 미국 연방 3선 하원 의원의 큰 위업(偉業)을 쌓은 김창준 이사장(김창준 한미연구원&정경아카데미)의 드라마와 같은 궤적들과 맞닿아 있다. 탑골프는 지난 7월 19 일 그와 제니퍼 안 부이사장을 만나기 위해 여의도 한국경제인협회(FKI) 17층 집무실로 향했다. 지금부터 그들의 부창부수(夫唱婦隨)같은 성공 스토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아~그리운 나의 어머니, 『창준아! 봄이 왔구나. 봄이 왔어』
자리에 앉자마자 김 이사장에게 어렸을 적 추억을 회상해 달라고 첫 물꼬를 텄다. 의외의 질문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술술 얘기를 시작한다.
“저는 종로구 통인동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우리 집 바로 뒤로 인왕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머리만 쳐들면 우람한 큰바위 얼굴과 마주칠 수 있었어요. 청운초등학교에 다니던 그때의 서울은 엄청 추워서 겨울만 되면 처마 밑으로 고드름이 줄지어 매달리고, 아침에 학교를 가려고 대문고리를 잡아 당기면 ‘으드득’ 하고 얼음장 깨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덜덜 떨던 겨울도 봄기운을 담은 햇살이 하루이틀만 퍼지면 산등성이로 노란 개나리와 분홍빛 진달래가 퍼져나가며 봄눈 녹듯 사라져 버렸습니다.
“창준아, 봄이 왔구나. 봄이 왔어.” 겨우내 닫아두었던 분합문(分閤門)을 활짝 열어놓은 채 어머니는 봄이 오는 인왕산을 한없이 바라보셨어요. 유독 말수가 적고 숫기가 없었던 저는 골목 밖으로 뛰어나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인왕산의 봄을 바라보았습니다. “엄마는 봄이 좋아요?” “그럼 좋고말고. 겨우내 얼어붙었던 세상에 봄이 오는 게 정말 좋지 않니?” 우리 집은 동네에서 손꼽힐 만큼 번듯한 기와집이었어요.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늘 출타 중이셨고 그 너른 집안에 사람이라곤 어머니와 4대 독자인 저뿐이어서 집안은 늘 고적(孤寂)하기만 했어요.”
링컨 대통령은 “나의 성공은 오롯이 어머니의 덕(德)”이라고 얘기했다. 김창준 이사장의 어머니 역시 귀하디 귀한 외아들에게 자애(慈愛)로우면 서도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지혜를 일깨워 주시지 않았을까.
미지의 세계를 향해 과감히 던진 출사표(出師表)
김 전 미 연방하원의원이 미국으로 가게 된 동기와 초창기 미국 생활이 몹시 궁금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저희 집안의 가훈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라’였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저는 이 말을 늘 가슴에 간직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20대 때, 사법고시 공부를 하기 위해 절에 들어간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언제나 ‘더 큰 곳에서 뜻을 펼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제가 당장 미국으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일이 터졌습니다. 바로 1960년 4.19 혁명이었어요. 아~ 우리나라는 너무 부패가 심해서 더 이상 제가 살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소 무모하지만 도전하겠다며 달랑 2백 불만 들고 갖습니다. 초창기 미국 생활이란 정말이지 고생 그 자체였어요. 처음에 캘리포니아에서 단칸방에 살면서 낮에는 대학(Chaffey College)에 다니고, 밤에는 식당에서 밤늦도록 일을 했습니다. 영어는 서툰 데다 물설고 낯선 이역만리에서 고독과 향수병은 무척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혜화동에 있던 보성고등학교 시절 ‘무턱’이라는 별명의 영어 선생님이 계셨는데, 이 분은 영어를 옛날 천자문 가르치듯이 가르치셨어요. 그때 영어를 좀 더 열심히 해둘 걸 하는 후회가 막심하더군요. 섣불리 ‘괜히 왔구나’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젊은 패기로 버텨나가던 중에 남가주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공과대학에 편입을 하였습니다. 그때쯤 만난 온타리오시의 ‘더 데일리 리포트(The Daily Report)’라는 지역신문 사장이 제게 아침에는 학교에 가고 저녁에 일할수 있는 기회를 주었어요. 정말 천우신조(天佑神助)와 같은 행운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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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김창준』으로 180도 환골탈태 : 그것이 알고 싶다
김 전 의원이 사업가로 시작했다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물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토목기사로 경험을 쌓은 뒤, 39살에 『제이킴 엔지니어링’(Jay Kim Engineering)』이라는 설계회사를 세웠습니다. 그때부터 제 삶의 여정이 확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회사가 고속 성장하면서 130여 명의 직원을 둔 미국 상위 500위권 중견기업이 되었어요. 그렇게 사회활동도 많아지고 보폭이 넓어지다 보니 엔지니어링쪽 에서 졸지에 유명인사처럼 돼버렸습니다. 이 무렵, 장차 무언가를 더 일구기 위해서는 경험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처음에는 정치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추상적인 착상일 뿐이었는데, 후에 실행에 옮겨야겠다는 의지가 생기더군요. 그래서 제가 살던 시(市)에서 『도시 계획 자문위원장』으로 봉사할 기회를 얻기 위해 발벗고 나섰습니다. 당시 시장이 이 분야에 이름이 알려진 저의 역량을 인정하면서 지방 정치에 첫발을 들여놓게 된 것인데 4년간을 일했습니다. 그동안 다이아몬드 바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살게 되었던 것이 제 정치 인생의 초석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지나고 보니 다이아몬드 바 시의원, 시장, 연방의원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발돋움의 ‘결정적인 계기’(Defining Moment)가 된 셈입니다.”
그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는 ‘나 김창준에게 무엇이다’라고 한마디로 얘기해 달라고 하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민주정치가 가장 발전한 나라, 또 기회를 준 고마운 나라’라고 단언한다.
『대만 핵폐기물의 북한 판매 저지』는 국가의 명운이 걸린 신의 한 수
김창준 전 의원에게 그의 미 연방하원의원 시절 가장 드라마틱했던 일이나, 대한민국 국익을 위해 성공한 비화(祕話) 몇 가지를 얘기해 달라고 하였다.
“제가 연방하원직에 있을 당시, 1997년도에 『대만』이 핵발전소 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여기에서 배출되는 핵폐기물을 처리할 곳이 마땅치 않자, 수천만 달러에 이 폐기물을 『북한』에 팔기로 결정했고 외화난에 시달 리던 북한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미국 내에서 이 사안을 바라보는 시선은 대만과 북한이 돈으로 거래를 하는 문제이며, 제3자인 미국이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어요. 저는 한반도에 핵폐기물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미국 의회를 움직여 대만을 저지(沮止)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미 의회를 납득시킬 명분이 필요했으므로 고심 끝에 그들을 설득할 두 가지 의견을 제출했습니다. 첫 번째, 핵폐기물을 국가 간 사고파는 전례(前例)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한반도에 핵폐기물을 운송하는 과정에 사고가 나거나 폐기물 관리에 문제가 생길 경우, 한국에 주둔한 미군들에게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 수 있다.
저의 발의에 미 의회는 이 내용을 담은 결의안(Concurrent Resolution) 을 통과시키기 위해 당시 하원의장이었던 『깅그리치』 의원을 중심으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대만이 북한에 핵폐기물을 반입하는데 대한 반대성명을 담은 이 결의안은 제가 발의하고, 미 외교정책 개혁법안의 추가 수정안 형태로 제출되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이 결의안은 강제성이나 구속력은 없는 미 의회의 의견(Sense of Congress)일 뿐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예상보다 컸습니다. 통과된 다음날 이 결의안이 대만 정부에 전달되었고, 결국 북한 측과의 거래는 중단되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으로 인해 대만에 핵발전소를 지으려던 GE 회장과 대만 총통으로부터 항의도 받았고, 여러모로 난처한 입장이었지만 최초의 한국계 미 연방의원으로서 미 의회를 움직여 조국 대한민국의 평화와 안녕에 이바지 할 수 있었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김영삼 · 김대중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 성사로 더 굳건해진 한미동맹
1990년대에는 대한민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미국 내에서는 아직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의 어려움을 겪은 나라이자 민주주의가 발전하진 못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었다고 한다.
“저는 미 의회 합동연설에 한국의 정치 민주화를 위해 앞장섰던 김영삼, 김대중 두 분 대통령을 각각 임기 기간 중에 초청하여 미국의 한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불식(拂拭)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곧 한국 대통령을 합동연설에 초청하는 내용을 담은 미 의회 Concurrent Resolution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1995년에는 김영삼 대통령, 1998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합동연설 초청을 각각 성사시켰습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직접 영어로 감동의 연설을 했고, 이게 끝나자 현장에 있던 400여 명의 의원들과 상임위 보좌관들은 모두 일어나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두 분 대통령의 연설은 의회에서 한동안 화제가 됐고, 워싱턴 정가는 앞으로의 한미관계를 굉장히 낙관하면서 한국은 역시 미국과 피를 나눈 아시아의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맹국이라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또한 한미동맹 50주년을 맞아 미 연방하원의원이 주관하여 이뤄진 한국인 최초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은 북한의 핵 위협으로 한반도가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급한 상황이던 당시 북한에게 한미간의 특별한 유대관계를 인정하고, 한미관계는 더이상 타협할 수 없다는 강력한 시그널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한국민의 숙원이었던 『미국 비자 면제』 해결의 결정적 단초를 제시
한국 정부는 1996년 한미 양국 간 경제통상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한국민에 대한 비자 면제를 검토해 달라고 미국 측에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 측은 비자 거부율이 2년 이상 2% 미만이라야 비자 면제가 가능하다는 미국 국내법을 들어 한국 정부의 요청에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당시는 한국인에게 미국 비자가 나오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미국 무비자 입국 문제’는 김영삼 대통령이 미국 방문 시 저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했던 두 가지 사안 중 하나였던 만큼(또 한 가지는 대북 문제),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풀고자 하는 사안이었습니다. 저는 한국민들에게 시험적으로 1년간 입국비자 없이 미국 입국을 허용토록 하는 법안을 미 하원 법사위원회에 제출키로 하고, 하원 입법 조사국의 검토를 거쳐 법안을 작성했습니다. 그러나 1996년 당시 미국 『비자면제 프로그램』 을 체결한 국가는 캐나다가 유일할 정도로 미국은 보수적이고 완강했습니다. 결국, 11년이 지난 2008년에는 한국도 『비자면제 프로그램』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법안 추진은 보수적인 미국의 이민제도에 맞선 한국의 첫 시도였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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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뉴트 깅그리치』 전 미국 하원의장
김창준 전 의원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나 미국 연방하원의원 시절 큰 도움을 받았거나 가깝게 지낸 정치인은 누구인지 물었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미국 공화당의 원로이자 『친트럼프 인사』인 뉴트 깅그리치 전 미국 하원의장을 1순위로 꼽았다.
“그의 리더십은 대단했습니다. 당시 조지아주 출신인 그가 압도적 표차로 당 대표(Minority Leader)로 당선되자, 공화당 의원들은 그를 중심으로 반드시 다음 선거에 승리해 다수당이 되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깅그리치 대표는 뛰어난 카리스마와 지도력을 보였습니다. 공화당을 창당한 링컨에 대한 반감으로 남북전쟁 이후 민주당이 득세하고 있었던 남부지역 의원들과 접촉하는 아이디어를 낸 것입니다. 그들은 소속이 민주당이지만 사고방식이나 정치철학이 공화당과 비슷하며, 명분만 주면 공화당으로 전향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그의 분석이었습니다. 동시에 정치인으로서 그의 역작인 『10大 대국민 약속』‘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절세, 국가안보 강화, 중소기업 지원 등을 골자로 하는 10개 법안을 100일 안에 통과시키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공화당 의원들은 모두 본인의 직을 거는 마음으로 밤낮없이 일했고, 법안 통과 과정을 진행했습니다. 이 약속이 지켜지는 것을 본 국민들은 결국 공화당에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공화당 230 : 민주당 204, 26석 차이로 46년 만에 공화당이 다수당이 되었습니다. 미국 정치史를 뒤바꿔 놓은 역사적 쾌거였습니다.”
『흔들어라, 나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 그의 좌우명이자 정치적 신념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좋은 책도 대동소이(大同小異)하지 않을까. 저자가 필생(畢生)을 통해 체득한 소중한 경험과 지혜를 한껏 담아 세상 밖으로 내놓은 역저 한 권은 밀알처럼 많은 열매를 맺으며 우리 사회를 밝히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세상을 변혁시키지 않겠는가. 그에게 인생의 좌우명이나 정치적 철학 혹은 나름의 슬로건이 무엇인지 물었다.
“제가 쓴 책의 제목처럼 ‘흔들어라, 나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입니다. 저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되,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희망을 놓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든 이루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비록 어려움에 처하더 라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제가 좋아하는 불후의 명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명대사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는 말처럼 누 에게나 새로운 기회가 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역시 명불허전이다. 그의 미래를 관통하는 통섭의 폭과 깊이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얘기를 더 들어봐야겠다.
“저는 연방 하원의원 재임 시는 물론 은퇴 후에도 몇 권의 책을 썼습니다. 『나는 보수다』는 초선 때 주위에서 모든 역경을 딛고 최초의 미국 연방의원이 된 소감을 글로 남겨서 후세들에게 귀감(龜鑑)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권유를 받아 시작했습니다. 퇴임 후인 2010년에는 『흔들어라, 나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를 출간했는데, 이 시기는 몰라보게 발전하는 고국에 올 때마다 이제까지의 제 인생을 돌아보며 만감이 교차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 저 자신은 물론 한국의 많은 독자들에게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습니다. ‘흔들어라. 나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문구는 이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건네고 싶은 저 김창준의 촌철살인(寸鐵殺人) 과도 같은 키워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웃음).”
2016년 11월 미국 대선이 한창일 때, 그는 한국의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후보를 지목하며 ‘트럼프 대통령에 대비하라’는 전무후무한 명저를 내서 우리나라 정치계는 물론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도대체 당시에 『시계(視界) 제로』 상태의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어찌 그리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는지 그의 탁견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사실 당시 다들 힐러리가 당선될 거라 생각했는데, 트럼프의 말 중에 제가 연방하원 의원에 당선되던 해 전당대회에서 했던 말과 일맥상통하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정치를 사업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계 어느 나라 국민들보다 실리적인 미국인들의 마음에 커다란 울림과 충격을 줄 것이라고 예상했고, 결국 트럼프 당선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만하다고 나름 판단을 했습니다. 부랴부랴 트럼프에 대비하라는 책을 쓰게 된 거죠(웃음).”
미국 연방 선진 의회 정치의 특징과 한국에 던지는 함의(含意)
김창준 이사장에게 미국 연방의회 선진 정치의 특징과 우리나라가 앞으로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지 물었다.
“대한민국의 정치 선진화를 위해서는 국회의원이 장관을 겸직하는 것, 지역구가 없는 비례 대표제, 그리고 정당에서 공천을 주는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회의원이 장관을 겸직하면 한 사람이 입법부와 행정부의 권한을 동시에 가지게 되어 『견제와 균형 원칙』이 훼손될 수 있습니다. 입법부의 역할은 법을 만드는 것이고, 행정부는 그 법을 집행하는 곳입니다.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은 이해 충돌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겸직을 금지해야 합니다. 또한 지역구가 없는 비례대표는 국민의 목소리를 직접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비례대표는 정당의 공천에 의해 선출되므로, 당 지도부의 의사에 반대를 못 하고 의원의 독립성을 약화시키며, 정당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당 공천 제도는 이 과정에서 금품 수수, 인맥 등 부정한 방법이 개입될 수 있으며 국민의 뜻과 괴리(乖離)된 후보가 선출될 수 있습니다. 의원들이 정당의 입장에 지나치게 종속될 수 있으며, 이는 국민의 정치 불신을 초래할 소지가 큽니다. 그러므로 공천권은 지역구 국민들에게 돌려 줘야 합니다. 이 3가지 문제점들만 조속히 해결해도 한국의 정치 제도는 훨씬 민주적이고 효율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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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아카데미의 역할과 의미 : 차세대 대한민국을 이끌 리더 육성
김창준 이사장은 10여 년 전에 한국으로 와서 그간의 경륜을 고국을 위해 십분 활용하고자 김창준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 그 취지와 성과 및 의미가 궁금하였다.
“처음 미국에 이민 가서 어려운 고학생 시절을 거치고 낯선 땅에서 사업가로서 성공을 이룩하면서 『최초』의 한국인 출신 연방하원의원이라는 과분한 타이틀도 거머쥐었습니다. 제가 미국뿐만 아니라 글로벌 무대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가지 확신하게 된 것은, 한국인의 우수성과 무궁한 발전 가능성이었습니다. 이 출중한 고국의 인재들에게 글로벌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주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길라잡이가 되고자 하는 뜻을 가진지 한참이었습니다. 은퇴 후 한국에 돌아와 이 뜻을 실행하기 위해 대한민국 국회의 허가를 얻어 『김창준 아카데미』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2012년도에 처음 ‘대한민국 정치 선진화, 경제 민주화’라는 모토하에 출범한 김창준 아카데미는 지금 27기까지 도합 1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아카데미 출신 중에 다수가 국회의원 금배지를 달았고, 국내 굴지의 기업 CEO로 발탁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이 모두 사회 각계 각층에서 전문가로 활약하면서, 『국가의 동량(棟梁)』으로서 큰 역할을 하도록 제가 뒤에서 계속 응원할 것입니다.”
각계각층 최고의 전문 강사진과 우수한 인재들 간의 시너지 극대화
김창준 아카데미에 초빙되는 강사진들의 면면은 가히 우리나라 최고의 전문가라고 정평이 나있다.
“초기 아카데미에는 정치와 경제 발전을 이끌어 나갈 정치인과 경제인 중심으로 모셨습니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이 논의되던 시대를 지나 이제 6차 산업이 강조되고, 코로나19 시국을 거치면서 우리 아카데미도 다양성과 전문성이 강조되는 강의 커리큘럼을 구성하도록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에, 현재는 정치·경제 전문가뿐만 아니라 외교, 국가행정, 법률, 문화예술, 의료, 천문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들을 삼고 초려(三顧草廬)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전현직 국무총리와 국회의원, 각 부처 장관들과 미국, 중국, 러시아 3국의 주한 대사들은 물론 구글, 아마존, 워너브라더스 등 글로벌 기업과 국내 대기업(CJ로지스틱, 롯데 등)의 CEO들을 강사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을 강사로 섭외하다 보니, 저뿐만 아니라 부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제처의 제안에서 참신한 아이디어도 얻고, 사무국 직원들과도 끊임없이 논의와 소통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늘 최고의 아카데미로 거듭나기 위해 연구하고 고심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최근 수강생들이 강사로서 직접 발표하는 『나는 강사다~』라는 테마가 좋은 반응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바로 직전 학기인 27기에 처음 도입된 제도입니다. 저희 수강생들이 워낙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고 CEO들도 많다 보니 그들의 생생한 이야기들을 들어보는 것도 서로의 지식과 경험의 공유 차원에서 강점이 클 것이라는 취지에서 시작했는데, 의외로 반응들이 뜨거웠습니다. 이번 첫 시도에는 27기 원우 3명이 강연을 했는데, 해외 이민법인을 운영 중인 CEO가 ‘미국의 이민법과 비자’, 세무전문 회계법인의 이사로 재직 중인 원우가 ‘절세 전략’, 교육사업을 하는 원우가 글로벌 리더의 필수덕목인 ‘영어’를 주제로 각 30분씩 진행했는데,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유익한 시간이었다는 게 중론입니다.”
미국 전직연방의원 연례 초청은 『한미 민간외교』의 튼튼하고 눈부신 가교
김창준 이사장은 미국 전직 연방의원 부부를 초청하는 행사를 매년 빠짐 없이 열고 있다. 정부도 쉽지 않은 역할인데, 그의 두터운 인맥 덕에 양국 우호 증진에 보이지 않는 기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행사의 취지와 연방의원 부부들의 반응 및 성과는 무엇인지 들어보았다.
“2011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처음 느낀 게 엄청나게 발전한 대한민국의 경제 상황과 폭넓은 저변의 인재들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제 눈을 의심하였다고 할까요. 이제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한계만 잘 극복한다면 훨씬 더 눈부신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진국인 미국에서의 시장과 연방하원의원 3선의 경험을 토대로 한미 양국 『민간외교의 가교』 역할을 하고자 활동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사)김창준 아카데미라는 명칭도 (사)김창준한미연구원으로 바꾸는 한편, 제가 속해있는 美 FMC(전직 연방의원협회, Former Members of Congress)를 통해 2019년부터 미국의 전직 연방의원 부부들을 한국으로 초청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직 의원들은 방한 시 공식 절차와 제한 사항 등의 문제로 제약이 많습니다. 반면, 저희 프로그램을 통한 FMC 전직 방한단은 공식 일정뿐 아니라 기업 인, 단체장, 학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유무형의 장점이 있습니다. 6~7명의 미 전직 연방의원들로 구성된 방한단은 배우자와 함께 입국하여 열흘간 한국에 머무는 동안 국무총리, 국회의원, 외교부장관, 지자체장들과의 만남을 갖고 양국 간 협력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으며,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CJ, 고려아연 등 기업을 방문 시찰하면서 각 기업과의 탄탄한 인프라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국제회의인 『아시안리더십컨퍼런스』에 연사로 참석하여 국내외 글로벌 리더들과도 만남을 갖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한 민국의 평화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참전하여 희생한 미군 장병들을 기리는 자리에도 동참함으로써,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기회를 갖는 일정도 매번 빠지지 않는 필수코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 방한 프로그램은 제가 미국 FMC의 멤버로서 직접 FMC와 소통하여 구성하는 프로그램인 만큼 이 교류를 통한 기대효과와 사후관리 영역의 확장성 및 발전 가능성이 국내 어떤 민간교류 활동보다도 크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2019년부터 2021, 2022, 2023, 2024년 총 7차에 걸친 행사를 통해 한국을 다녀간 미국 연방의원들은 예외 없이 『친한파(親韓 波)』가 되어 한국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제가 가진 열정만으로는 힘든 큰 프로젝트입니다. 한 분 한분 거명하며 설명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한미 양국의 『민간외교자』로 활동하면서 남은 여력을 국익에 기여하고자 하는 저의 간절한 마음을 도와주시는 후원자분들께 이 기회를 빌어 다시 한번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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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탁동시 : 김창준 이사장과 제니퍼 부이사장의 아름다운 동행
김창준 이사장과 제니퍼 안 부이사장으로부터 솟아나는 뜨거운 열정과 생생한 체험담을 듣다 보니 어느덧 한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그래서 화두를 두 분의 얘기로 돌렸다.
“우리가 은혼식(銀婚式)을 해야 하는 어언 25년이 됐는데, 집사람은 몇년 전까지 워싱턴에서 미 연방정부 프로젝트들만 하는 마케팅회사를 운영했습니다. 현재는 아카데미 부이사장직을 맡아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2019년부터는 저희 김창준 한미연구원에서 주관하는 『FMC 민간 외교』 일을 맡아서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집사람은 형제가 열 명이나 되는 대가족인데, 가장 맏언니가 가왕 조용필씨의 부인입니다. 가족들은 모두 미국에 살며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진력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마누라 자랑하면 팔불출(八不出)이라고 놀린다지만, 제니퍼는 매사 똑 부러지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는 말들도 하나 버릴 데가 없기에 늘 처의 얘기를 경청합니다.”
제니퍼 안 부이사장은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덕담을 건넨다. “이사장님은 워낙 유머러스하고, 늘 긍정적이십니다. 게다가 한번 마음을 먹으면꼭 성취하고야 마는 진취적인 모습이 저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웃음).”
두 분은 현재 여의도에 집무실 및 자택이 있다.
“아무래도 두 곳이 가까워서 편리합니다. 아카데미 초창기에는 국회의사당에서 진행했기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면, 지금은 『직주근접(職住近接)』이라 여러모로 유익합니다.” 혹시 두 분에게 가장 도움을 주는 분들은 누구냐고 물었다.
“글쎄요. 처음 아카데미를 시작했을 때는 주윗 분들이 아이디어도 주고, 크고 작은 도움들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저희들이 항상 열심히 살았기에 꼭 누구에게 아쉬운 얘기를 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민간외교 활동을 활발하게 확대하다 보니 점차 고마운 분들이 꽤 많이 생기더군요. 저희가 현재 다니는 새에덴교회의 소강석 목사님과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이영훈 목사님, 한덕수 총리님 부부, 고려아연과 CJ그룹, 그 외 현대자동차, 포스코, 경주시 주낙영 시장님 등 고마운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에필로그 : 미래의 『버킷 리스트』는 김창준 기념관 건립
이제 약속된 시간이 다 지나가서 아쉽지만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혹여 향후 꼭 이루고 싶은 미래의 버킷 리스트는 무엇인지 물었다.
“제 집사람은 여력이 된다면 『김창준 기념관』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게 그리 녹록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미국 연방의회에서 갖고 있었던 소중한 기념물이나 근 60년 넘도록 미국 생활을 하며 보관하고 있던 이러저런 물품들도 꽤 싣고 왔기에 기념관이 건립된다면 후세에 남겨줄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긴 할 것입니다만, 저희들의 희망사 항이 아닐까요(웃음).”
특별히 즐기시는 취미나 건강관리 비법이 있으신지와 골프에 대해 물었다.
“요즘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집사람이랑 같이 개인 PT 레슨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골프를 1970년도부터 쳤는데, 7~8년 전쯤 허리를 다쳐 요즘은 거의 손놓고 있습니다. 제 핸디캡은 한창 잘 칠 때는 보기 플레이를 했습니다. 제니퍼는 1년에 두 번 있는 아카데미 총동문회골프대회 포함 일 년에 몇 번 나가는데, 구력보다는 명랑골프를 즐기는 편입니다. 10여 년 전에 워싱턴 근교골프장에서 홀인원을 할 만큼 기본기는 탄탄하도록 제가 짬짬이 레슨을 해주었어요.”
마지막으로 이번 9월부터 개강하는 28기 김창준 아카데미 입학생들이나 독자들에게 한 말씀해달라고 하였다.
“급변하는 세계 정세속에서 대한민국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이번 학기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전문가분들을 초청하여 심도 있는 강연을 듣는 코스를 준비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최신 정보와 깊이 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고, 우리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활발히 토론하고 공유하며 발전적인 방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전문가들의 지혜와 수강생들의 열정이 결합된다면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를 더욱 밝게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 공부할 틈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시간이 생긴다 한들 공부하지 않는다(謂學不暇者雖暇亦不能學矣)고 하지 않나. 공부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배움이 절실한 사람이 한다. 이번 가을에는 『The End』가 아니라 『The And』를 모토로 삼아 보는 게 어떤가. 김창준 아카데미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인생 문장이라는 ‘페스티나 렌테, 즉 천천히 서둘러라 그리하면 내일은 큰 파도를 타리라(Cras ingens iterabimus aequor!)’는 말로 두 분이 마음먹은 바가 꼭 성공하기를 기원드리며 에필로그에 갈음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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