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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자연이 빚어내는 시인의 정원 ‘김영진문학관’을 가다

“시혼에 점화된 불빛으로 세상을 보면 모두 시의 몸짓입니다.”

이유림 기자(topgolf2269@naver.com) | 기사입력 2025/01/09 [18:45]

시간과 자연이 빚어내는 시인의 정원 ‘김영진문학관’을 가다

“시혼에 점화된 불빛으로 세상을 보면 모두 시의 몸짓입니다.”

이유림 기자 | 입력 : 2025/01/09 [18:45]

 

새벽녘 어스름이 걷히듯 시는 천천히 우리 영혼을 일깨운다.

그리고 시인은 그 여명의 순간을 평생 붙잡아 시간의 흐름 속에 영원히 새기려 한다.

자연과 시간이 빚어낸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일. 시인이자 출판인으로 살아온 그는 그렇게 ‘영원’이라는 불가능한 꿈을 좇아왔다. 6천 평의 드넓은 대지 위에 세워진 김영진문학관은 바로 그 꿈의 결정체다. 시간과 자연이 빚어내는 시인의 정원에서 그를 만났다.

 

서울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고양시 덕양구 통일로. 이곳에 들어서면 마치 다른 세계에 온 듯한 감동이 밀려온다. 6천여 평의 드넓은 대지 위에 펼쳐진 벽제 김영진문학관은 단순한 문학관의 경계를 넘어 자연과 예술과 문학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종합문화예술공간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삼백여 대의 차량이 동시에 주차할 수 있는 넓은 광장을 지나면 대리석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세 개의 간판이 방문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벽제 김영진문학관’, ‘김영진성경시문학관’, ‘벽제 김영진시비공원’, 이 세 개의 이름이 이곳에 담긴 깊이와 무게를 짐작하게 한다.

 

봄비를 기다리며 웅크린 작은 대리석 수족 연못의 검푸른 이끼들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작품이 되어 있고, 곳곳에 자리 잡은 대형 조각과 설치 작품들은 마치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것처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문학관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선사하는데, 사계절 내내 방문객들에게 새로운 감동을 전한다. 이런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속에서 한국 현대 문학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나는 경험은 그 자체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시인의 초상, 그 치열한 삶의 흔적

1944년 경북 예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김영진 시인의 삶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서사시다. 어린 시절부터 책과 사랑에 빠진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문학의 꿈을 키웠다. 당시 안동사범병설중학교에서 만난 소설가 성호운 선생은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시와 글쓰기를 직접 지도하며 문학의 씨앗을 심어준 스승의 가르침은 평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미션스쿨인 경안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는 문학과 신앙이라는 두 개의 날개를 달게 된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 1천 권의 책을 읽었다는 일화는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잘 보여준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책을 읽으며 문학의 바다에 빠져든 그는 글쓰기에도 매진했다. 시골 소년의 이런 독서 편력은 훗날 한국 최대 기독교 출판사를 일구는 밑거름이 되었다. 21살의 젊은 나이에 첫시집 『초원의 꿈을 그대들에게』를 발간하며 문단에 데뷔한 것은 그의 문학적 재능과 열정이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였다. 그의 초기 시에는 이미 신앙과 문학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독특한 시 세계가 드러나 있었고, 이는 후일 그가 성경 전체를 시로 재해석하는 대작의 씨앗이 되었다.

 

출판계의 혁명가, 성서원을 일구다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성서원을 설립한 그의 도전은 한국 출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성서원은 단순한 출판사가 아닌, 한국 기독교 출판문화의 새로운 장을 연 이정표가 되었다. 대학 졸업 후 동양 출판사 영업부에서 출판의 기초를 배운 그는 출판계에 대한 남다른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성서대백과사전』과 『칼빈 성경 주석』 등의 대작들을 연이어 출간하며 출판계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고, 전성기에는 전국 80개 지사에 500명이 넘는 직원을 둔 대형 출판사로 성장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소지한 성경책 10권 중 6권이 성서원 출판물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출판 역량을 잘 보여준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52년에 창간된 우리나라의 대표적 소년 잡지 ‘새벗’이 폐간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인수하여 550호까지 발간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 공로로 1997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성서원은 단순히 종교 서적만을 출간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 교양, 아동도서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출간하며 한국 출판문화의 지평을 넓혔다. 특히 그는 양질의 기독교 서적을 통해 한국 기독교 문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영혼의 노래, 25년의 대장정

김영진 시인의 대표작 『성경의 노래』는 그의 문학적 집념을 보여 주는 기념비적 작품이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 1189장을 하나하나 시로 쓴 ‘성경의 노래’ 성경 시집을 국내 최초로 발간했다. 이 작업은 무려 2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매일 오전 8시부터 밤 9시까지, 하루 12시간씩 붓을 놓지 않았다. 이과정에서 그는 왼쪽 눈 근육이 마비되는 고통을 겪었지만,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성경의 각 구절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면서도 원문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려 심혈을 기울였고, 여기에 찬송가의 선율을 입혀 시의 울림을 더했다. 최종적으로 5권으로 출판된 성경 시집은 성경의 깊이 있는 메시지를 현대인의 감성에 맞게 재해석한 그의 전 생애를 걸고 완성한 대작이었다.

“시는 영혼의 노래이며, 한 편의 시가 구름을 타고 올라가는 생명의 숨결”이라는 그의 말은 이 작업에 임하는 그의 진정성을 잘 보여준다. 고된 작업 끝에 완성된 『성경의 노래』는 종교적 경건성과 문학적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룬 한국 기독교 문학의 금자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계문학과 만나는 시의 정원

문학관의 백미는 단연 시비공원이다. 120여 개의 시비에는 셰익스피어부터 톨스토이, 괴테, 도스토예프스키까지 세계 문학의 거장들의 작품이 김영진 시인의 시적 언어로 재해석되어 새겨져 있다. 이 시비들은 단순한 돌판이 아니라, 세계 문학과 한국 문학이 만나는 특별한 접점이 된다. 햄릿의 고뇌, 파우스트의 방황, 도스토예프스키의 심리적 탐구가 김영진 시인의 섬세한 시어로 새롭게 태어난다. 고즈넉한 소나무 산책로를 거닐며 만나는 이 시비들은 마치 살아있는 문학 교과서처럼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시인은 “문학은 인간 영혼의 기록이며, 위대한 문학 작품들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우리에게 삶의 진실을 말해준다”고 강조한다. 그의 이러한 문학관은 시비공원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재해석한 시비에서는 “존재냐 부재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살아있음이여, 죽어있음이여, 이것이 내 운명이로다”라는 한국적 정서로 재탄생되었다. 이처럼 시비공원은 세계 문학의 정수를 한국의 시적 감성으로 재해석한 독특한 문학적 실험장이 되고 있다.

 

시간과 자연이 빚어내는 예술의 공간

하늘정원이라 불리는 문학관 위쪽 공간은 또 다른 차원의 예술을 선사한다.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면 마치 하늘과 맞닿은 듯한 너른 공간이 펼쳐지는데, 이곳에서는 계절마다 각기 다른 풍경의 향연이 펼쳐진다. 봄에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화사하게 피어나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며, 가을에는 단풍이 붉게 물들 고, 겨울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사계절 내내 시적 감성을 자극한다. 이곳에는 이어령 선생이 김영진 시인을 평한 글이 새겨진 거대한 돌판이 있다.

“시가 빛이라면 그의 시는 닭이 울기 전의 새벽, 아직 먼동이 트기 전의 어둠이다... 김영진 시인의 시는 몸짓이고 시선이고 온몸의 진동이다. 날숨과 들숨 사이에 멈춰 있는 공기, 폐부에서 맴도는 뜨거운 입김이다.” 이 평가는 김영진의 시 세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하늘정원의 작은 원형 무대에서는 정기적으로 시낭 송회와 음악회가 열린다. 달빛 아래서 울려 퍼지는 시와 음악은 방문객들에게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한다. 특히 봄과 가을에 열리는 ‘시월의 밤’ 행사는 수많은 문학 애호가들이 찾는 주요 문화행사로 자리 잡았다. 하늘정원의 곳곳에는 쉼터가 마련되어 있어, 방문객들은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공간에서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내일을 여는 문화의 산실로

김영진문학관은 이제 단순한 전시공간을 넘어 현대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치유의 공간이다. “시혼에 점화된 불빛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시가 된다.”는 시인의 말처럼, 이곳은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시각과 깊이 있는 사색의 기회를 제공한다. 문학관은 또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문화의 중심지 역할도 하고 있다. 매주 진행되는 ‘문학 아카데미’에서는 시 창작, 문학 감상, 인문학 강좌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운영되며, 계절별로 열리는 문학 페스티벌은 지역 주민들의 문화생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특히 청소년들을 위한 문학교실은 미래의 문학인을 양성하는 요람이 되고 있다.

 

 

김영진 시인이 꿈꾸는 “시민을 위한 힐링과 산책 공간”은 이제 현실이 되어 우리 곁에서 숨쉬고 있다. 더불어 문학관은 지역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고, 다양한 예술 장르 간의 협업을 도모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매년 증가하는 방문객 수는 이 공간이 지닌 문화적 가치와 의미를 잘 보여준다.

 

김영진문학관의 또 다른 특징은 자연과 문학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공간 구성에 있다. 문학관 주변으로 조성된 정원에는 사계절 내내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자라나고 있다. 봄에는 벚꽃과 진달래가 화사하게 피어나고, 여름에는 능소화와 무궁화가 만발하며, 가을에는 국화와 단풍이 깊은 정취를 자아낸다. 겨울에는 하얀 눈 쌓인 소나무가한 폭의 수묵화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이런 자연 속에서 시비들은 마치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만나는 시구들은 각각의 계절과 어우러져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문학관 곳곳에 마련된 쉼터에서는 차를 마시며 사색에 잠길 수 있고, 작은 연못가에서는 물소리를 들으며 시상을 떠올릴 수 있다. 이처럼 김영진문학관은 자연과 예술, 그리고 인간의 감성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특별한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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