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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DJ 정부 20여 년 역사의 산증인이자 정치 9단 박철언(朴哲彦) 한반도복지통일재단 이사장

초야에 묻혀 『선진복지통일국가』 실현의 그날까지 세월을 낚고 있는 『초격차 문치가(文治家)』

전봉진 대기자(toyzone@naver.com) | 기사입력 2023/12/01 [17:35]

5공~DJ 정부 20여 년 역사의 산증인이자 정치 9단 박철언(朴哲彦) 한반도복지통일재단 이사장

초야에 묻혀 『선진복지통일국가』 실현의 그날까지 세월을 낚고 있는 『초격차 문치가(文治家)』

전봉진 대기자 | 입력 : 2023/12/01 [17:35]

『추고험금(推古驗今) 소이불혹(所以不惑)』 이라는 말이 있다(명심보감). 옛일을 거울 삼아 오늘 일을 본다면 풀지 못할 어려운 일이 없다는 뜻. 흔히 역사란 지나간 일을 공부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가장 미래지향적인 학문이라고 한다. 20세기초 이탈리아의 철학자 『크로체(Croce)』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고 단언했다.

한편, 과학철학에 큰 업적을 남긴 『토머스 쿤(Thomas Kuhn)』은 “모든 획기적인 발견은 그것이 온 과거와 그것이 시작되는 미래의 일부다. 길이 구부러지는 지점에서 있으면 그 길이 어디서 왔는지 볼 수 있고, 그 다음에 그 길이 어디로 가는지 살펴볼 수 있다. 미래는 과거에서 온다. 그러나 직선으로 오지는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지식은 경륜(經綸)과 융합될 때 놀라운 시너지를 발휘한다. 이것으로 풀지 못할 현실의 난제는 없다. 특히 천하의 패권을 둘러싸고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벌이는 곳에서는 더욱더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탑골프는 박철언 한반도복지통일재단 이사장(이하 박 장관)을 만나 대한민국의 5~6공 시대부터 현재 상황 및 미래에 대한 얘기를 듣기 위해 지난 11월 21일 오후 3시 선릉역 그의 변호사 사무실 겸 집무실로 찾아갔다. 장장 1시간 반에 걸쳐 열정과 감동, 때론 격정이 뒤엉킨 생생한 얘기들이 오갔다. 바쁜 와중에도 귀중한 시간을 내준 그야말로 소중한 『대한민국의 인적자산』이자 『역사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탑골프는 그에게 해박한 국내외 정치 경험과 시문학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초격차 문치가(文治家)』라는 미래지향적 작위(爵位)를 드리고자 한다.

 

 

 

냉철한 지성, 불굴의 용기, 뜨거운 가슴을 지녀라

『용장(勇將) 밑에 약졸(弱卒) 없다』는 말처럼 큰 인물 뒤에는 존경스런 부모님의 가르침이 자리매김한다. 고난에 부닥쳐도 ‘신은 네가 감당할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준다’며 자존감을 불어넣는다. 링컨 대통령은 “나의 성공은 오롯이 어머니의 덕(德)”이라고 하였다. 박 장관의 선친은 그에게 언제나 ‘냉철한 지성, 불굴의 용기, 뜨거운 가슴을 지니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그래서 묘석(墓石)에는 ‘眞하게 强하게 最善을 다하신 님이시여, 고이 잠드소서’라고 새겼다.

“아버지께서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6형제인 저희들을 깨워 운동을 시키셨어요. 매섭도록 추운 겨울의 새벽 산책길은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그때만 해도 오리털 잠바는 커녕 검정물 들인 미군 담요로 옷을 해입는 게 고작이었지요. 태연히 우리들을 피난민과 빈민이 몰려 사는 판자촌으로 데리고 다니셨어요. 거기에는 대, 소변 섞인 하수돗물이 미끌미끌하게 얼어붙고 누더기옷을 걸친 사람들이 시커먼 얼굴로 움막 같은 집을 들락거렸어요. ‘이 사람들도 너희들과 같은 인간이고 같은 민족이다. 커서 이런 사람들도 함께 잘 살 수 있는 밝은 사회를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 명심해라.’ 그때는 선친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중고, 대학교 입시나 사법시험 때마다 친구들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함께 따라 다니시다가, ‘철언아, 소변보고 들어 가거래이!’하고 당부하셨어요. 긴장하여 답안을 제대로 쓰지 못할까 노파심에서 하신 말씀이지요. 경북 영천군 은해사 운부암에 기거하며 고시준비하는 동안에는 무더운 여름 볕에도 밑반찬을 마련하여 한시간여 산길을 자주 오르내리셨어요. 정치보복을 당해 1년 4개월간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에는 아들을 위해 백일기도 드리다가 평상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치기도 하셨어요. 누군가가 『어머니~』라고 말하는 소리만 들어도 제 가슴은 찡합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위대합니다. 사랑합니다. 한마디로 저에게 아버지는 『공직자의 자세』를, 어머니는 한없는 감성으로 『시인의 영감(靈感)』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아호 청민(靑民)과 박철언(朴哲彦) 이름 속에 숨겨진 시크릿 코드

박 장관의 아호와 이름 석자에 담긴 함의(含意)를 듣고 보니 무릎을 ‘탁’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민』이라는 아호는 제가 지었어요. 낭만을 아는 민초 (民草)로 살겠다, 또한 그들과 꿈과 아픔을 함께 나누며 끈질기게 살아가겠다는 저의 다짐을 담았어요. 6형제 중 차남인 저의 이름은 선친께서 지어주셨는데, 총명할 哲과 선비 彦, 즉 『총명한 선비』가 되라는 뜻이라고 할까요 (웃음).”

가히 명실상부요 명불허전이다. 그가 『박철언』이란 이름으로 살아 간다는 것은 그 이름값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소명이다. 그는 최고의 관운(官運)을 타고난 인물답게 대한민국 민초들의 행복을 위해 진력해야 하는 숙명을 태어날 때부터 이름 속에 숨겨두고 있었던 건 아닐까.

“사실 저는 문학 전공의 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래서 경북고 시절부터 『청맥(靑脈)』이라는 문학동아리 활동에 심취했습니다. 맑은 영혼과 불꽃 같은 열정 으로 늘 청년들과 호흡하며 살고 싶었어요. 그러나 부모님과 친지들의 ‘너는 법대를 가라. 거기 가서도 마음껏 문학을 할 수 있다’는 강권에 못 이겨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들어가는 바람에 전혀 뜻밖의 험난한 길을 걸어왔던 것입니다(웃음).”

내친김에 좌우명을 물었다. “저의 생활 자세를 다짐하는 말은 『신의와 성실』이고, 삶의 철학은 선친이 주신 『냉철한 지성, 불굴의 용기, 뜨거운 가슴으로 살자』입니다.”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 격동의 정치 비사(祕史)를 통해 선진복 지통일국가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는 회심의 역작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은 한때 대한민국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 명저(名著)답게 절판된 지 오래라서 대형서점에는 단 한 권의 책도 남아 있지 않길래 중고서점(알라딘)을 검색하여 급히 1, 2권을 주문하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첫 장을 여니 ‘격동의 현대사를 함께 살아온 님들에게, 앞으로 우리 민족을 이끌어 나갈 젊은이들에게 삼가 이 책을 바칩니다.’는 감성적인 글귀가 눈에 ‘확’ 들어 왔다. 가슴이 찡하다. 『격동의 현대사』라는 말이 필자의 폐부(肺腑)를 깊게 후벼판 탓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명저도 대동소이(大同小異)하지 않겠나. 인간 박철언이 목숨 걸고 필생(畢生)을 통해 체득하고 응축한 주옥같은 경험과 지혜를 한껏 담아 세상 밖으로 내놓은 이책은 우리 사회를 밝히는 빛과 소금이 되어 한 사람의 인생은 물론 우리나라 국력(國力)과 명운(命運)까지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1980년 제 5공화국부터 DJ 정부에 이르기까지 20여 년이라는 격동의 역사 한가운데 외로이 있었던 박 장관의 『영혼의 외침이자 절규(絶叫)』다.

그는 “지금 나는 한 시대의 한 쪽의 사초(史草)를 남기고자 한다. 그 진정한 해석과 평가는 당사자들이 다 사라지고 난 후에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들이 모두 드러나고 난 다음에 후세의 역사가들이 해야 할 몫이다. 그러나 현장의 살아 숨쉬는 사실들을 경험한 누군가가 진실 그대로를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겨놓아야 하지 않을까. 오늘의 국가 운영의 주역들이 균형감 있는 『역 사관(歷史觀)』에 바탕하여 겸허한 마음과 절제된 자세로 국가 경영에 임해 주기를 바라면서 이 책이 그런 마음을 갖도록 하는 계기(繼起)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서문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 미래의 비전을 관통케 하려는 그만의 『통섭의 폭과 깊이』를 느낄 수 있어 지금 읽어도 가히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는 이 시대 최고의 『백미(白眉)』이자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와도 같은 한편의 대하 드라마가 아닐까.

 

 

존경하는 김철수 교수님과 사랑하는 아내 현경자에게 진 평생의 빚

평생의 동반자 『현경자 여사』와는 어떻게 만나셨고, 혹시 두 분 사이의 에피소드나 러브스토리가 있으면 살짝 귀뜸해 달라고 하였다(웃음).

“제가 대학원 다닐 때 경북고, 서울법대 9년 선배이자 유명한 헌법학자이신 은사님 『김철수 교수』께서 1969년 여름 당시 27세였던 저에게 22살 철부지(?) 같은 현경자씨를 소개해 주셨어요. 이듬해 눈이 펑펑 오던 1월 10일 날 결혼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53년여를 함께 살고 있으니 대단한 인연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내와 데이트할 때 제가 일부러 떠보려고 택시 대신 버스를 타고 다녔어요. 그러자 처음에는 화를 내더군요(웃음). 뒤늦게 저의 진정성을 깨닫고는 진심 어린 사과를 했어요. ‘아~이제 평생을 같이 해도 되겠 구나’ 비로소 안심이 되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공직에 전념하느라 평생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뜨거운 8월에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가도록 하며 여러모로 아내에게 지은 죄가 많아 『유구무언(有口無言)』입니다. 금혼식 (金婚式)도 훨씬 지난 오늘에서야 아내에게 ‘그간 잘 살아줘서 너무 고맙다...’고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고맙다는 저의 고백성사(告白聖事)의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현경자 여사는 100점이지만, 저는 겨우 낙제점을 면할 정도밖에 안 됩니다(웃음). 김철수 교수와의 첫 인연은 대학 시절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로 유명한 그분의 전 아내 『전혜린』 (31세에 요절한 천재문학가)을 지도교수로 하여 독문학을 공부하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부터지요. 은사님은 제가 『법대 수석 졸업』이라는 낭보를 처음 알려 주며 기뻐해 주셨어요. 특히, ‘국회는 『정치 투쟁』을 하는 곳이 아니라 『정치적 타협』을 하는 곳이다. 『의원내각제』로 개헌하여 『평화통일의 초석』을 깔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살아 계실 때 유신헌법 비판으로 박해를 많이 받으셨지만, 이제 좋은 세상에서 영면(永眠)하시기를 기원드 립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추상(秋霜)같은 소신과 따뜻한 가슴을 지닌 『검사 박철언』

박 장관에게 젊은 검사 시절 일화를 들려달라고 하자 2가지 사건을 떠올린다.

”부산지검 검사 시절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이 전지훈련을 내려 왔다가 이회택 선수가 나이트클럽에서 술에 취해 테이블을 뒤엎으며 난동부린 일이 있었어요. 당시 차범근 선수 등이 제 방에 찾아와서 무릎 꿇고 선처해 달라며 읍소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어요. 지검장에게 석방 상신을 하니 완강하게 거부했어요. 당시 박정희 대통령께서 ‘폭력 행위와 조직폭력배 엄단 지시’가 떨어진 데다 이미 언론에 대서특필(大書特筆)되어 어쩔 수 없다는 것. 다시 찾아가서 설득하여 가까스로 기소유예로 석방시켰지요. 또 한번은 상부로부터의 수차례 만류 지시에도 불구하고, 공장을 짓는다는 구실로 낙동강하구 철새 도래지인 『을숙도(乙淑島)』를 불도저로 불법 매립한 재벌급 회사를 문화재관리법 위반으로 형사 입건하여 결국, 한직인 공판 검사로 좌천된 적이 있었어요. 당시 『공업화』가 주된 이슈였는데, 언론에서 ‘지금 공장 하나라도 더 지어야 하는데 총수들을 구속해도 되느냐’며 온통 난리였어요. 결국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는데, 언론에서 『공업화냐 자연보호냐 논란』을 일으킨 우리나라 첫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도 있지만, 끝을 벼린 뾰쪽한 돌이 벽을 뚫지 않겠습니까. 저는 소신과 원칙을 지키려다 손해도 많이 봤지만, 공직자로서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할 수 있었다고 자부합니다(웃음).”

 

『詩人 박철언』으로 환골탈태 : 그것이 알고 싶다

한때 시대를 풍미(風味)했던 박 장관이 초야에 묻혀 지금까지 모두 5권의 시집을 내놓으며 시인으로도 문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중국 주나라 명제상 강태공(姜太公)은 『일자로 된 낚시바늘』로 세월을 낚았다는데, 그도 이루지 못한 큰 꿈에 대한 회한이 흉중(胸中)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장 아끼는 시는 무엇인지 라는 화두를 던지며 슬슬 물꼬를 텄다. 그랬더니 갑자기 서가(書架)로 가더니 시집을 꺼내서 친필 사인까지 해준다. 언뜻 겉표지 맨 윗단에 ‘한국문학사를 빛낸 문인 대상 수상 기념’, 아래쪽에는 ‘따뜻한 가슴을 지닌 님에게 이 시집을 바칩니다’ 라는 글귀가 보였다. “제 홈페이지에 모두 456편의 창작시가 실려있습니다. 다섯 번째 시집 『오늘이 좋아 그래도』 역시 애지중지합니다. 이 시들은 모두 제 영혼이 우러나는 창작품 이자 하나같이 자식 같은 심정이라 특별히 최애작(最愛作)을 판별할 수는 없습니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나요(웃음).”

잠시 상념에 잠기더니 말을 이어간다. “제가 여당인 신한국당을 홀연히 떠난 것은 1997년 말 대선을 앞둔 때입니다. 국가 부도 사태를 초래한 책임이 있는 여당의 김영삼 대통령 후계자는 이회창 총재였어요. 여지껏 한 번도 여야 간에 수평적으로 정권이 교체된 적이 없었으니까 제가 야당인 자민련에서 『DJP 연합』을 통해서 정권을 교체해야 하겠다, 그 고리는 『내각책임제』로서 향후 『한반도 통일시대』를 대비하자는 복안이었습니다. 김대중 후보가 대선 에서 승리하며 결말이 났지요. 그때 이미 저의 정치생명은 다 던져 버리고 불나방처럼 뛰어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대구에서 총선에 나와 처음으로 쓴맛을 보았어요. 정권을 교체하고 『영·호남 화합』을 위해 앞장섰는데, 고향인 대구에서조차 몰라주는 서글픈 현실에 실망하고 정치판을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당시 아직 58세밖에 안 될 때였어요. 2000년 6월경 미국 보스톤 대학 객원교수로 초청받은 후, 원래 하고 싶었던 문학 소년으로 귀환하게 되었는데, 말하자면 정치에 대한 환멸이 저를 영혼의 고향이자 어머니 품과 같은 시인의 길로 이끈 『귀거래사(歸去來辭)』라고 할까요. 詩란 사람을 사람 답게 하는 고귀한 생명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웃음).”

 

YS 덕분에 졸지에 주머니가 두둑해지다

박 장관은 그간 우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베스트셀러 작가다. 책 얘기를 더 나눠보았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자는 창조할 수 없다』(약칭 변두창)는 제가 새로운 6공화국 시대를 준비하면서 각 분야의 비전을 담은 구상을 펴낸 것인데, 『스피치 라이터(Speech Writer)』들이 많이 인용도 하고 카피도 했습니다. 정치권과 지식인층에서도 꽤 많이 읽혔어요. 한편, 『4077 면회왔습니다』는 약 500일 동안의 감옥생활 중 받은 수많은 위로편지와 답장들 그리고 저를 면회 온 김수환 추기경, 조용기 목사, 김장환 목사와 불교계 총무원장 스님들의 사연들을 담아서 출소 이후 펴냈는데 13쇄까지 찍으며 대대적인 선풍을 불러왔습니다. 일본의 동경문예사에서도 『감옥 에서 토해내는 한(恨)』이라는 제하로 대히트했는데 본의 아니게 YS 덕분에더 유명세를 타며 인지세까지 두둑하게 들어왔어요. ‘인생사 새옹지마(塞 翁之馬)’더군요(웃음).”

 

 

그가 내세우고 싶은 『치적(治績)』과 아쉬웠던 점은 무얼까

박 장관의 명저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부제 5공, 6공과 3김 시대의 정치 비사 1, 2권에는 우리 대한민국을 현재의 위치에 있도록 굴기(崛起)시킨 괄목할 만한 활약들이 무려 1100여 쪽에 걸쳐 생생하게 나와 있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대체 그가 가장 내세우고 싶은 공(功)은 무엇이고 반면에 아쉬움이 남는 일은 무얼까 무척 궁금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단연 첫째는 『북방정책(北方政策)의 대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이에 힘입어 우리나라의 경제활동 영역을 글로벌하게 확대할 수 있었다는 측면이지요. 중국을 위시한 구소련, 동구권 등과의 수교를 통해 우리나라의 『경제적 지평과 영토』가 대폭 넓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남북한 간 『42차례의 비밀접촉』을 통해 대북 포용 정책의 일환으로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을 도출한 것입니다. 넷째는 체육 분야 남북교류를 통해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현정화, 이분희 조가 우승을 차지하고, 남북청소년축구 단일팀은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당당히 8강에 들었어요. 마지막으로, 생활체육협의회를 법인화하여 전국 방방곡 곡에 대거 산책길을 조성하고, 테니스장, 수영장, 게이트볼장 등을 만드는등 사회체육을 활성화함으써 오늘날 우리나라 국민들의 평균수명이 늘어 났다고 합니다. 특히, 체육청소년부장관 시절 청소년육성기본법을 정부 수립 후 최초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회고해 보면, 크게 2가지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3당 통합 당시 내각책임제로 개헌해서 장차 남북통일에 대비하려고 했지만, 김영삼 후보의 배신과 노태우 대통령 주변 인물들 몇몇이 신권력에 붙음으로써 결국 통합 의 의미가 좌초된 것은 아직도 아쉬움이 큽니다. 이로 인해, 노 대통령 말기에 우리 북방정책까지 상당히 혼미하고 퇴조하게 되었지요. 제가 YS와의 갈등 때문에 권력 중추에서 밀려나는 바람에 북한의 미국 · 일본과의 고위급 접촉을 차단함으로써 우리나라는 공산권하고 전부 외교 관계를 맺었지만, 우리가 77선언과 상반되는 정책을 펴고 구소련과 베를린 장벽마저 붕괴되는 것을 지켜본 북한이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껴 결국 핵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입니다. 이 점이 두고두고 아쉽습니다.”

 

가까이서 지켜본 대통령들의 리더십 특성과 나의 단상(斷想)

박 장관에게 그간 지근거리에서 목도(目睹)한 전직 대통령들의 강, 약점은 무엇인지 가감 없이 얘기해달라고 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경제 성장과 국가안보 강화의 공이 있고, 『대통령 단임제』를 처음 실천하였으나, 집권의 정통성 문제와 권위주의식 통치 및 비자금이 걸림돌이 되었지요. 노태우 대통령은 『6.29 선언』으로 산업화에서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무혈혁명 (無血革命)』을 통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민주화를 실현시켰어요. 그리고 북방정책 성공과 대북 포용정책을 실천했지만, 『물태우』라는 별명처럼 각 분야에서 분출하는 민주화 욕구들을 원활하게 연착륙시키지 못한 점과 비자금 문제 역시 족쇄라고 할 수 있지요.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 으로 문민화를 이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어요. 하지만 자기는 단 하루도 감옥생활을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보복을 가장 많이 하였고, 특히 우리나라 초유의 외환위기를 초래한 점은 두고두고 뼈아픈 실책이 아닐 수없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조기에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7년 반 투옥 생활을 했음에도 단 한 번도 정치보복을 안 한 점은 높이 평가할 치적입니다. 특히 남북교류도 활성화했지만, 아쉽게도 일방적으로 퍼주는 햇볕정책이란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요.”

 

서서 죽을지언정 결코 무릎 꿇고 살지는 않겠다

박 장관의 닉네임은 『6공의 황태자』니 『리틀 프린스』니 실로 다양하다. 마치 요즘의 한동훈 법무장관이 회자되듯이. 하지만 정작 그는 언감생심 보통사람들은 꿈도 못 꾸는 이런 말 자체에 무척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단, 『컴퓨터 달린 불도저』라는 닉네임은 치밀하게 계획하여 과감히 큰일을 성공시킨다는 의미에서 당시 주변에서 불러주곤 했다며 이 말은 좋아한다고. 그는 힘들거나 앞이 잘 안 보일 때면 『맥아더 장군』의 『아버지의 기도』라는 시를 간혹 떠올린다. ‘원하옵건대 평탄하고 안이한 길로 인도하지 말고, 고난에 직면하여 분투하고 항거할 줄 알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중략)’라는 구절이다. 이 기도문은 맥아더 장군이 태평양 전쟁 중 필리핀에서 다섯 살배기 늦둥이 아들에게 남긴 훌륭한 영적 유산으로 그의 사후인 1964년에 세상에 공개되었다고 한다. “YS가 어느날 아들 김현철씨 집과 하얏트 호텔 객실로 저를 은밀히 불러 ‘박 장관, 이제 내각책임제는 버리고 내가 대통령이 되게 도와 주면 차기 대권은 당신을 밀어주겠다.’고 하였으나, 제가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바람에 YS와 척을 지고 이후 고난과 형극(荊棘)의 길로 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잖아요. 하지만 그건 안 된다고 했어요. 결국 저의 이상주의적 철학과 소신 때문에 고초를 겪었지만, 저는 『아버지의 기도』라는 시를 자주 반추(反芻)합니다. 사실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거와는 달리 YS는 낮에는 투사로서 목청을 높이지만, 밤에 만나면 늘 정치자금 딸린다고 죽는 소리하는 2중 플레이를 하며 실리를 잘 챙기더라고요. 반면, 처음에는 저도 DJ를 용공주의자가 아닌가 의혹을 가졌는데, 가까이서 만나보니 두뇌 회전과 상황 판단력이 빠르며 알려진 것과는 전혀 딴판이더군요.”

 

 

『성공적인 삶』을 묻는 너에게 : 청년들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

박 장관은 도대체 세월이 정지된 것 마냥 동년배 지인들에 비해 무척 동안(童顔)이었다. 그 비결을 알려달라고 하였더니 기다렸다는 듯 술술 나온다.

“나이는 무시할 수 없겠지만 건강과 일, 사랑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모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야구, 핸드볼, 테니스, 탁구, 축구 등 구기 종목은 죄다 좋아했어요. 골프 구력도 50여 년 되는데, 골프는 굉장히 건강에 좋은 스포츠입니다. 결국 끊임 없는 연습과 매너, 자기와의 싸움이더라고요.

또한 사교와 인간관계에도 도움이 많이 됩니다. 과거에는 눈비가 쏟아져도 아랑곳하지 않았기에 보기플레이는 했지만, 요즈음은 연습도 게을리하다 보니 90대 중반 치기도 버거울 때가 많습니다(웃음). 홀인원은 10년 전쯤 춘천 라데나CC에서 딱 한 번 해봤습니다. 그 밖에 저는 매일 새벽 한 시간 걷는 산책을 눈비가 와도 빠지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저녁에는 집에서 30분정도 반신욕(半身浴)을 하면서 목과 눈, 귀와 혀 운동 등을 하는데 건강관리에 상당한 도움이 되는걸 제 스스로 느끼게 됩니다.”

작금의 우리 청년들이 실의에 빠져 『N포 세대』라는 말도 생겨나는 슬픈 현실이다. 체육청소년부장관 시절 혁혁한 일을 한 그에게 삶의 비전과 활로를줄 메시지는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산다는 것은 한 줄기 바람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의 5번째 시집 제목 『오늘이 좋아 그래도』처럼 인생은 충분히 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시간 날 때 저의 시집을 꼭 한번 읽으며 찬찬히 음미(吟味)한다면 좋은 길라잡이가 될 것입니다. 간혹 제 자식들 이나 가까운 사람들이 인생 성공담을 물어오는 게 많은데 그럴 때면 꼭 제자작시 399번(성공적인 삶을 묻는 너에게)을 읽어보라고 권합니다.”

 

윤석열 정부의 현 위치와 성공을 위한 한 조각 단견(斷見)

과거 조선을 지키는 호국신기(護國神器)가 거북선이었다면, 지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박 장관께 물었다.

“먼저 『약무핵 시무국가, 若無核, 是無 國家)』로서 이제 핵이 필수불가피한 호국신기가 되었어요. 또 하나는 『약무 자유민주수호세력, 시무국가(若無自由民主守護勢力, 是無國家)』로서 자유민주수호세력이 대한민국을 지키는 핵심 보루(堡壘)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윤석열 정부가 그에게 국무총리나 국정원장 혹은 통일부장관이나 대통령 브레인 역할의 책사직(策士職)을 요청한다면 수락하실지 물었다. “저는 이제 녹봉(祿俸)을 받는 자리는 추호도 맡을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윤대통령의 서울법대, 검찰 선배로서 제가 그동안 경험을 많이 체득한 대북정책이나 외교정책 등은 기회가 온다면 우리나라와 윤 정부의 성공을 위해 자문역 정도는 해줄 수 있습니다(웃음).”

곧이어 『윤석열 호』의 현 위치와 향후 나아갈 좌표 등에 대해 까다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랬더니, 이번 12월에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와 북한대학원대학교 총동문회가 공동 주최하는 삼청포럼에서 특강이 잡혀있다며 거기서 발표할 원고 중 일부를 참조하라고 주는데 아직 오픈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내용들이다.

“윤 정부가 한미동맹을 복원하고 한미일 공조체제를 정립한 것은 매우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미국에 편중하여 중국, 러시아와의 외교 공간을 좁혀버린 것은 우려스럽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국가와 국민이 공동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공동선)』는 자유, 민주, 평화, 인권, 복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동선의 효과적 성취를 위해서는 『1국 패권주의』라는 집중화 리스크 보다는 『다원주의』가 바람직합니다. 한편, 북한은 핵무기 자체가 북한 세습체제의 근간이자 대미, 대남 전략의 핵심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따라서 윤 대통령은 북핵 폐기 시까지는 비대칭에 의한 상시 불안보다는 『공포의 균형』을 통해서라도 우리의 안보와 민족의 생존을 지켜야 합니다. 이제 확장억제 방안만으로는 우리 안보 불안 해소가 안됩니다. 특히, 북한 인권문제를 윤 대통령이 직접, 자주 제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야당이나 시민단체를 통해 우회적으로 접근하는 게 현명합니다. 우리의 통일 기조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인바, 공존을 전제로 점진적 평화통일 추구가 원칙 이고,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상으로도 상호 내정간섭은 않기로 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필로그 : 김일성 주석이 박철언에게 간청했다는 명시 『오, 백두 (白頭)여!』

박철언 장관은 1985년부터 1991년까지 6년여 ‘남북 간의 평화통일을 위한 정상회담 준비 차관급 비밀 회담’의 대통령 전권을 위임받은 남측 수석대표 로서 도합 42차례에 걸쳐 김일성 주석과 허담 비서, 한시해 대표를 비롯한 북한 측의 요인들을 만나 민족문제를 비밀리에 논의하였다.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20차례는 북측지역에서 짧게는 하루종일 길게는 3박4일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오, 白頭여!』는 1989년 7월 2일 평양과 백두산 아래 삼지 연의 김일성 주석 별장에서 열렸던 남북비밀회담을 마친 뒤, 조국분단 후  남측요인으로는 최초로 북한 쪽 등산로를 통해 백두산에 오른 후 그 감동을 시로 남긴 것이다. 『오, 白頭여!』의 초고 원고는 김일성 주석의 특별한 요청으로 현재 북한 측에서 보관 중인데, 김 주석은 그 답례로 박철언 대표에게 옥(玉)으로 만든 도자기, 찻잔 세트 등을 줬다고 알려졌다.

6.25 전쟁으로 우리 민족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김 주석도 박철언의 오, 백두(白頭)여!라는 장엄한 大서사시(敍事詩) 앞에 무너지는 어쩔 수 없는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The pen is mighter than the sword.)’라고 하지 않나. 박철언! 그는 단연코 초야에 묻혀 세월을 낚는 강태공이 아니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할 정치 9단이자 메시아가 아닐까. 때가 되면 그가 받은 찻잔으로 커피 한잔 나누며 못다한 얘기들의 화룡 점정(畫龍點睛)을 찍어야겠다.

 

 

 

오, 백두(白頭)여!

 

                                                                                                靑民 박철언

 

그리던

그리도 그리워하던

백두(白頭)에의 길

오! 설레이는 가슴

 

산정(山頂)에 덮힌 검은 구름

천둥에 소나기 짙은 안개와 여름 우박

시간은 조여 오고 빛은 멀기만 하다

오! 불가능할 듯한 천지(天池)와의 만남

 

태고(太古)의 잔설(殘雪)을 비끼고

사슴이끼 만병초 들판을 굽이돌아

드디어 영산(靈山)의 환희

오! 1989년 7월 2일 11시

 

태양(太陽)이 솟아오른 우주의 모태(母胎)인 듯

유구한 민족의 힘의 원천인 듯

방황하던 나의 영원한 고향인 듯

오! 신비의 거대한 거울 천지(天池)

 

마지막 용암마저 토해내게 한 부석위에

신(神)처럼 둘러선 장군봉 향도봉 백운봉 차일봉 비류봉

송화강 만주벌판으로 달려가는 달문

오! 천지여! 민족이여! 조국이여!

 

통일의 노래를 목메어 합창한다

그러나 끝내 천지는 답(答)이 없다

40년 넘도록 분단(分斷)과 불신(不信) 적대(敵對)와 대결(對決)

 

오! 여기 설 자격조차 없는 南과 北이여

 

화해하자 단합하자

끊어진 혈맥(血脈)을 우리가 잇자

우리 서로 하나가 되는 그 자랑스런 깃발을 높이 쳐들자

오! 동지여! 동지여!

 

치솟는 웅혼(雄魂)을 달래고 산허리에 모여 앉아

다시 쏟아지는 백두(白頭)의 비를 보며

구운 감자 산천어 칠색송어 사슴고기 들쭉술 약초술

아! 장백의 사랑이여!

 

가문비 분비 자작나무 숲을 뚫고

빗길 속에 달리는 귀로(歸路)

백두폭포 형제폭포 천군바위 압록강

아! 백두산이여! 조국이여! 민족이여! 동지여!

통일이여! 사랑이여! 

 

                                                                               1989년 7월 2일 백두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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